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
“사치의 여왕”이라는 이미지가 그녀를 따라다녔지만,
그녀가 남긴 편지 속에는 사치와는 거리가 먼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처형 직전까지도 여왕으로서의 품위와, 한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간직했던 그녀.
오늘은 그녀의 편지를 통해 들여다보는 7가지 감정의 초상을 소개합니다.
1. 외로움 – '나는 이곳에 친구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진심으로 나를 대하지 않아요. 그들은 내 웃음 뒤에 나의 불안을 모릅니다.”
— 루이 16세와 결혼 직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낸 편지 중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에서 벗어나 15세에 프랑스로 시집온 앙투아네트.
언어도, 문화도, 감정도 통하지 않는 베르사유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철저한 고립이었습니다.
2. 모성애 – '내 아이들만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나는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거짓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겪을 고통이 내 것보다 크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
— 투옥 중, 딸 마리 테레즈를 언급하며
가장 강한 순간, 가장 여왕다웠던 순간은
사치스러운 궁전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
아이를 걱정하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3. 억울함 – '내게 씌워진 모든 말들은 진실이 아닙니다.'
“나는 한 번도 백성을 조롱하지 않았고, 케이크를 먹으라 말한 적도 없습니다.”
— 재판 직전, 변호사에게 보낸 말 중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말.
그녀가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죠.
하지만 당시 그녀는 항변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존재였습니다.
4. 공포 –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이 감옥의 침묵을 견디고 있어요. 어쩌면 이것이
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1793년 투옥 중 기록
젊은 나이에 죽음을 직면한 앙투아네트는
처형을 앞두고도 감정을 정리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체념에 가까운 침묵이었습니다.
5. 자존심 – '나는 여왕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내가 비록 감옥에 있을지언정, 나는 프랑스의 여왕이며,
내 행동은 언제나 그것에 걸맞게 하겠습니다.”
— 왕정 폐지 직후의 편지
그녀는 감옥에서도 왕비로서의 품위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 마지막 말처럼:
“나는 일부러 형리의 발을 밟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주세요.”
6. 사랑 – '루이, 우리는 함께였고, 함께 끝나려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부부의 이름으로 살 수 없지만,
당신은 여전히 내 인생의 유일한 동반자입니다.”
— 루이 16세 처형 후
정치적으로는 무기력했던 루이 16세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그는 여전히 가족이자 보호자였습니다.
비극은 둘을 갈라놓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끝까지 그 곁에 머물렀습니다.
7. 침묵 – '이제 말할 수 없기에 남겨둡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는
의외로 차분했습니다.
화려했던 삶을 정리하며 남긴 말은,
원망도, 슬픔도 없이
한 줄기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결론: 그녀는 사치의 여왕이 아니라, 시대의 인간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앙투아네트는
머리에 깃털을 꽂고 춤추던 귀부인이 아니라,
편지 속에서 고독과 자부심, 모성과 두려움을 드러낸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녀의 편지는 여왕의 목소리가 아닌,
여자의 목소리였고,
한 시대의 침묵 속 외침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지 사치의 상징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버린 진심의 주인공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