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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마리아 테레지아 – 제국을 움직인 어머니 여왕

by 하이유랑 2025. 3. 31.

왕관은 흔히 남자의 것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유럽에서, 남성보다 강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합스부르크 왕조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심장이었던 여성 군주.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국의 자리를 부정당했고,
그 싸움 끝에 가문과 국가, 자녀 모두를 자신의 방식으로 지켜낸 여왕이 되었다.


1. 왕위는 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카를 6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러나 문제는 명확했다 — 그녀는 여자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여성이 오른다는 건 불경이다.”

이웃 국가들은 반기를 들었고,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전장을 돌며 병사들에게 직접 호소했다.

“나는 여왕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그녀는 전쟁에서 버텼고, 결국 그녀의 통치권은 인정받게 되었다.

(추천 이미지: 어린 자녀를 안고 병사 앞에 선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면, 회화풍)


2. 프란츠 1세, 왕보다 남편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1세를 황제로 올렸지만,
실제 권력은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제국의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했다.
내각 회의, 외교, 세제 개혁, 군사 운영… 프란츠는 상징, 테레지아는 실세였다.

(추천 이미지: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나란히 앉아 있는 궁정 그림)


3. 16명의 자녀, 외교의 도구가 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총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이 자녀들을 합스부르크 가문의 외교 전략으로 활용했다.

  • 장남 요제프: 신성로마제국 황제 계승
  • 딸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왕비로 정략결혼
  • 다른 자녀들 역시 이탈리아, 바이에른, 스페인 등과 결혼

그녀는 어머니였지만, 그보다 먼저 정치가로서 자녀를 사용했다.


4. 개혁군주, 근대 오스트리아의 초석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순한 상징적 여왕이 아니었다.
그녀는 실질적인 국가 개혁가였다.

  • 국세청과 군대 개편
  • 교육제도 강화
  • 농노 해방 정책 추진
  • 국가 중심 행정 개혁

그녀의 정책은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행정 기반이 된다.

(추천 이미지: 쇤브룬 궁전, 마리아 테레지아 개혁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5. 마지막까지 ‘여왕’이 아닌 ‘어머니’로 남다

말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 문제와 가문 정치에 집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프랑스 시집살이를 걱정하며 수많은 편지를 보냈고,

“내가 너를 위해 정치를 했듯, 너도 프랑스를 위해 사명을 다하라.”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정치가 아닌, 가족이었다.


결론: ‘강한 여왕’이 아닌, ‘끝까지 어머니였던 군주’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순히 여성으로서 통치한 것이 아니라,
모성의 감성과 정치의 냉철함을 동시에 쥔 지도자였다.

그녀는 “여성은 군주가 될 수 없다”는 시대의 편견을 뚫고
가문과 국가,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강인한 어머니의 그림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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